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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일상

[에세이] 주인집 딸아이 이름짓던 날

by 하남이 2009.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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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안, 제니퍼 배?

휴가 기간중에 집에서 딩굴딩굴하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냉방도 시원치 않은 차 안에서 몇시간 동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길거리에 시간을 버리느니 실속있는 피서를 즐기고 싶어서였습니다. 식구들과 대학로에 가서 "로미오와 줄리엣 시즌 2"를 보면서 배꼽이 떨어져라 실껏 웃어 보고,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한지 얼마 안되는 쓰나미에 관한 영화 "해운대(주연 설경구, 하지원)"도 보았습니다.  이번 휴가 나름 짱이었습니다. 

김나영이 화가 나면 머리에서 김 나영? 한채영은 집이 한 채영? 구준표가 준 표 워쨌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름을 갖고 하는 유모어입니다. 휴가기간중에 지난 5월 9일 암으로 세상을 뜬 장영희 교수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오보 장영희"라는 제목으로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간혹 학생들 중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름들이 있다. 예컨대 '박아지', '변소길', '김치국' 같은 이름은 좀 놀림을 받을 지도 모르지만 남이 쉽게 기억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아는 어떤 학생의 이름은 '스안'인데, 나는 백조를 뜻하는 영어의 swan(스완)과 관련된 아주 낭만적인 이름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학생의 아빠가 네 번째 딸을 낳고 이름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은 채 출생신고를 하러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생각해 낸 이름이었다. "아 내가 버스 안에 있으니 '버'를 떼고 '스안'이라고 하자!"라고.

요즘엔 꽤 많은 학생들이 일부러 영어이름을 지어 사용한다. 특히 취업을 해서 명함을 만들 때 원래 이름은 아예 적지 않고
예쁜 영어 이름만 적어놓는 경우도 많다........(중략)

그런데 한 번은 어떤 졸업생이 지도교수를 만나지 못했다고 내게 취업추천서를 써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눈에 띌 정도로 얼굴이 예쁘고 날씬한 학생이었는데 이름을 묻자 "제니퍼 배"라고 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중에서 인용, p.184~185중)

좋은 우리말 놓아두고 영어이름을 말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도대체 한국이름이 뭐나교 장교수님이 묻자, 이 학생이 머뭇거리면서 하는 말이 "제 이름이 좀 독특한데요. 창자요.... 배창자." 그 이야기를 듣고 장영희 교수는 두말없이 성명란에 제니퍼 배라고 써 주었다고 합니다. ^-^ 

이름이 뭐 대수겠습니까? 사람이 중요한 것이겠죠. 이름만 멋있으면 뭐하겠습니까? 사람이 실속이 있어야 겠죠..


# 주인집 다섯번째 딸아이 이름짓던 날
  
지금부터 25년 전의 일입니다. 20대초반 어린시절 직장을 따라 경상도 바닷가 마을에서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내가 살던 자취집 주인아저씨는 40대 중반의 딸부자로 초등학생부터 유치원생까지 고만고만한 딸아이가 모두 넷이었습니다. 딸 많은 집 아이들은 모두 예쁘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아이들은 바다냄새를 흠뻑 머금은 바람을 맞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이 사십을 훌쩍 넘긴 주인집 아주머니가 다섯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 이번엔 아들이겠지.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
할머니는 이번에는 꼭 아들 손자를 얻어야 한다며 온갖 지성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 (이번에도) 쏙았다.
점심 먹으러 집에 들렀다가 아이 우는 소리에 이상하다 싶어 주인집 건넌방 앞으로 갔더니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시면서
땅이 꺼지는 소리로 탄식하지 뭡니까. 할머니는 방금 다섯 번째 딸 손주를 받고 나오는 차였습니다. 어깨너머로 방안을 힐끗보니 아주머니가 벽에 기댄채로 아이를...... 하회탈 같은 할머니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더 늙어 보였습니다.



- 이를 우짜노, 우짜노 말이다.

낙담한 할머니는 툇마루에 앉아 애꿏은 담배만 피워댔습니다. 방안에서는 나이든 산모는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눈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 야야~ 내 왔데이.

아기를 낳고 며칠 후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정어머니의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리자마자 아주머니는 설움에 복받쳐 버선발로 울면서 마당까지 뛰어나왔습니다.


딸 다섯을 두게 된 아저씨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저씨는 넷째 딸이 태어났을 때에도 너무도 실망이 되어 딸아이 이름도 짓지 않은 채로 출생신고를 하러 갔고, 면사무소 직원이 즉석에서 지어주는 이름으로 넷째아이의 출생신고를 마쳤다고 합니다.

 

- 아저씨, 아이 이름은 지었나요?

넷째 딸 이름을 지은 내력을 알고 있는 지라 아저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 이름은 뭐 할라꼬? 내사마 이름이고 뭐고 모리겠다.

한숨만 내쉬고 있는 아저씨는 다섯째 딸아이의 이름 짓는 일을 아예 포기한 것 같았습니다.




그때 문득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나는 “기쁨의 근원”이 되라는 뜻으로 “희원(喜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부르기도 쉽고 뜻도 좋았습니다. 이름을 적은 종이를 받아들고 아주머니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벌써 20년이 휠씬 넘은 일인데 책을 읽다가 생각나서 써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 불리워질 이름을 짓는 일이 정말 행복하고 가슴 뿌듯한 일이라는 것을 이 때 배웠습니다. 결혼 후 희한하게도 저도 딸만 셋을 낳았다.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지어 주면서 옛날 그 행복했던 경험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희원아! 예쁜 너의 모습 한 번 보고싶다. 잘 지내고 있지?


2009/06/22 - [세상사는 이야기] - [가족에세이] 접대오목, 접대알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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